제목 배화여학교 6인의 소녀들, 98년만에 독립운동 인정받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8-08-16 08:59 조회수 370

배화여학교 6인의 소녀들, 98년만에 독립운동 인정받다


▶ 광복절계기(73주년) 독립유공자 177명 포상, 올해부터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기준 개선해 177명 중 65명(36.7%)이 개선안으로 포상되어 여성,무명 의병 등 발굴·포상 사각지대 해소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확대 위한 노력으로 배화여학교 6명의 소녀들이 98년만에 독립운동을 인정 받고,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인 이은숙 여사 등 총 26명의 여성 독립유공자 발굴·포상됨

▶독립유공자 포상은 1949년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0,912명, 건국포장 1,253명 대통령표창 2,887명 등 총 15,052명이 포상됨 (여성 325명)


□ 국가보훈처는 8월 15일(수)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아 일제의 감시 속에서 과감하게 3?1운동을 재현한 배화여학교 6인의 소녀들과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한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손부 허은(許銀) 여사 등 177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고 밝혔다.

○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93명(애국장 31, 애족장 62) 건국포장 26명 대통령표창 58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으며 여성은 26명이다.

○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3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 이 가운데에는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기준을 개선함으로써 포상된 분들과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전문가 용역 등 정부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포상된 분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 우선 포상 심사기준 개선(’18.4)으로 177명 가운데 65명(36.7%)을 포상하였다.

    - 3개월로 되어 있던 최소 수형·옥고기준을 폐지하여 3개월 이하라도 독립운동으로 인해 옥고를 치른 경우 포상
    -독립운동 참여 때문에 퇴학을 당한 경우 학생신분을 감안해 포상
    -실형을 받지 않았더라도 적극적인 독립운동 활동 내용이 분명하면 포상을 전향적으로 고려


○ 또한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을 확대하기 위해 전문가 연구용역을 실시(’18.1.12∼5.12)하여 202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추가 조사와 검증을 거쳐 26명을 포상하였다.

 

□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0,912명, 건국포장 1,253명, 대통령표창 2,887명 등 총 15,052명(여성 325명)에 이른다.

 

□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 관련기관과 사료수집 협업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국내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알려지지 않은 여성, 무명의 의병 등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데 더욱 노력해나갈 계획이다.

 

□ 제73주년 광복절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일제의 철통감시 속, 과감하게 3?1운동을 재현한 배화여고 6인의 소녀들
   3·1운동 1주년을 맞아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6명의 여학생들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1920년 3월 1일 서울 배화여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학교 기숙사 뒤편 언덕과 교정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수십 명이 일경에 검거되어 재판(경성지방법원, 1920.4.5)에 회부되었다. 이 가운데 김경화(金敬和)?박양순(朴良順)?성혜자(成惠子)?소은명(邵恩明)?안옥자(安玉子)?안희경(安喜敬) 등 공적과 옥고가 확인된 6명이 포상의 영예를 안았다. 학생들은 치밀한 사전 준비를 거쳐 당일 등교하자마자 학교 기숙사 뒷산과 교정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1년 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재현하였다. 포상자 6명은 거의 10대 후반의 어린 여학생들로서, 최연소자인 소은명 선생의 경우 16세에 불과하였다. 3?1운동 1주년을 맞아 일제가 만세시위 재연을 우려하여 서울시내 곳곳에서 철통같은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가운데, 어린 여학생들에 의해 과감하게 결행된 만세시위라는 점이 주목된다.

○ 서간도 무장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한 ‘독립군의 어머니’, 허은 여사
   만주에서 독립군의 항일투쟁 지원에 헌신한 허은(許銀)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여사는 재종조부 되는 왕산 허위(許蔿) 선생(’62, 대한민국장)이 순국(1908)한 뒤, 줄곧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던 중 만 6세가 되던 1915년에 일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부민단(扶民團) 등 현지의 독립운동 단체가 주관하는 국치기념일(8.29)과 개천절 행사 등에 참여해 ‘국치가’와 애국가를 부르며 민족?독립의식을 키웠고 16세가 되는 1922년 이상룡(李相龍)(’62, 독립장)의 손자인 이병화(李炳華)(’62, 독립장)와 결혼했다. 이후 1932년 귀국할 때까지 시댁 어른들의 독립운동을 보필하면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회의 때마다 독립운동가들의 조석을 조달하고 군정서의 독립군들이 입을 군복을 만들어 보급하는 등 서간도 무장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하였다. 여사의 친정과 시댁 모두 여럿이 서훈된 대표적인 독립운동 명문가로 손꼽힌다. 여사에 대한 포상은 시조부 이상룡 선생이 남긴『석주유고』, 시부 이준형 선생의 「유서」(1942), 여사의 회고록,『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등의 자료에서 활동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 서정적인 시풍으로 일제에 저항의식을 표출한 김윤식(김영랑) 선생
   전남 강진에서 독립만세운동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윤식(金允植)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우리에게는 김영랑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선생은 1919년 3월 25일 고향인 강진군 강진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태극기 등을 제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30년대 「毒을 차고」, 「가야금」등의 시를 발표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일제의 갖가지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김윤식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 군자금 모집하다 체포되어 교형을 받고 순국한 의병 계석노 선생
   평안북도 의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계석노(桂錫魯)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평북 선천군 심천면 출신으로 1908년 10월부터 1909년 3월 사이에 평북 의주?선천?철산군 일대에서 유상돈(劉尙敦)의 부하로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항전을 위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교형을 받고 불과 34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2015년에 국가보훈처에서 발굴하여『관보(官報)』(1910.6.20) 등 자료에서 순국 사실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의진의 지휘관인 유상돈 의병장은 2011년에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함께 활동한 이여숭(李汝崇)?차연욱(車連旭)?이정식(李定植) 선생도 이번에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법정에서 당당하게 독립만세 이유를 밝힌 여학생, 곽영선 선생
   황해도 신천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곽영선(郭永善)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3월 24일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중 고향인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에서 만세운동 준비를 위해 태극기를 만들고 3월 27일 신천읍 장날에 동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받고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녀는 법정( 1919.9.11)에서 자신은 “인도정의, 민족자결에 의해 조선인민의 인성으로” 당연히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며 시위참여는 “일본에 반항하는데 있지 않고 자유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밝혀 일제 판사를 당혹케 하였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판결문(1919.9.11) 등에서 만세시위 활동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1993년 애국장을 받은 곽림대(郭林大) 선생의 딸로, 부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서훈된 흔치 않은 사례이다.

○ 군자금 모집하다 중형을 받은 열혈 독립군 소대장 한성호 선생
   평안북도 일대에서 무장 독립군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중형을 받은 한성호(韓成浩)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0년 3월 평북 의주에서 조직된 천마산대(天摩山隊)의 소대장으로 동년 4월 평북 구성에서 현지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천마산대는 3?1운동 직후 평북 의주의 천마산을 근거지로 최시흥(崔時興)(’62, 독립장) 등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항일 무장단체로, 화승총과 일경으로부터 노획한 총검으로 무장하고 여러 차례 유격전을 벌여 1920년 이후 남만주의 광복군사령부에 흡수될 때까지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가출옥관계서류」(국가기록원),『대판조일신문 한국관계기사집』(독립기념관) 등의 자료에서 천마산대의 활동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 비밀결사 조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5인의 여성
   평안남도 순천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5명의 여성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다. 최복길(崔福吉)?김경신(金敬信)?김화자(金花子)?옥순영(玉淳永)?이관옥(李觀沃) 선생 등은 1919년 음력 10월 평남 순천에서 윤찬복(尹燦福)(1990, 애족장) 등과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부인향촌회(婦人鄕村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회원들로부터 의무금 등을 징수하는 방법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밀사를 통해 상해의 임시정부에 전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동 단체의 주모자로 회계를 맡았던 최복길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회원으로 참여해 독립운동 자금을 출연한 나머지 네 분에겐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이들에 대한 포상은 국가보훈처가「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육군성, 1921.2.28) 등의 자료에서 공적내용을 확인하여 이루어졌다.  

○ 독립의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은 ‘혁명가족’의 안주인, 이은숙 여사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조력하고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한 이은숙(李恩淑)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여사는 1889년 충남 공주 출신으로 1908년 10월 20일 서울 상동예배당에서 우당 이회영(李會榮)과 혼례를 올렸다. 그 후 1910년 남편 일가족과 함께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사업을 조력하였다. 이후 1919년 남편과 함께 다시 중국 북경으로 거처를 옮겨 현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후원하고 1925년에 귀국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남편 이회영이 1932년 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대련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중 순국한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들 이규창(李圭昌)(’65, 독립장)이 1935년 3월 상해에서 친일파 처단에 성공하고 피신 중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이듬해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3년을 받고 복역할 때도 자식의 옥바라지를 하며, 조국독립의 대의를 간직한 채 꿋꿋이 가시밭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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